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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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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05 16:13 조회3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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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입니다-

 

하느님 계획 성찰

 

하느님의 계획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 하느님의 선물의 빛 안에서 깊이 성찰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우리는 이 세 가지 선물로 인해 우리가 빠질 수 있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선물 역시 하느님 계획의 일환이다. 이 세 선물이 우리 안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우리는 성삼위의 정신과 힘, 마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믿음이란, 우리의 어두운 지적 현실에 대한 신성한 응답이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성삼위가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성삼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성삼위가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희망이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서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꾸 우리 활동을 막는 두려움과 절망에 대항하게 하는 힘이다.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성삼위의 힘을 통해 내가 하도록 부름받은 나의 사명을 이루어낼 수 있다.” 사랑의 선물을 통해 우리는 약하고 흔들리는 의지를 강화시키게 되고, 성삼위처럼 올바르고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믿음

 

하느님께서 인간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시기에 우리 역시 그분처럼 인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토록 돌보시고 계시기에 우리 역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성삼위가 초대하는 길을 따라야 하며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성삼위는 이 계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다. 이 계획은 성삼위의 꿈이며, 우리도 성삼위처럼 이 계획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이런 바탕 안에서 우리는 정의(正義)의 구현, 재화의 균등한 분배 같은 인간을 돌보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기도와 은총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성삼위가 바라보는 대로 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되고, 성삼위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대로 느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성삼위와 함께 세상 안에 참여해야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인적인 영성은 세상의 곤란과 어려움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서 멀어지게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런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표한 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라는 사목 헌장의 서두야말로 우리 성찰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또한 실제 우리 삶 안에서 울려 퍼져야 한다.

 

개인적이고, 파편화된 영성처럼 비종교적인 활동도 우리의 죄성을 제대로 이겨나갈 수 없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비록 세상의 선익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하느님의 전망 안에서보다 풍요로워 지지 않는다. 사회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빛에 의지하여 여러 일을 진행해 나간다. 그러나 이 빛은 어둠을 꿰뚫고 세상 안에 계속 퍼져나가기에 역부족이다. 하느님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다. 이 빛으로 우리는 죄의 깊이와 인간의 고집스러운 모습들을 속속들이 보게 될 뿐만 아니라 각 사람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도 보게 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의미를 제한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운명을 생각하고 계시며,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이를 성찰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들은 이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등과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올바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희망

 

믿음이라는 하느님의 전망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의 에너지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다. 큰 희망을 품고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온갖 어려운 짐들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있고, 세상에 점점 깊이 참여하면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의와 맞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불의와 맞서는 사람들은 때때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가두어 버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면서 매우 수동적이고, 쉽게 절망하며 실제로 이 세상의 당면 과제들을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하려 애쓰는사람들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또한, 신앙이 없는 활동가의 에너지와 추진력만으로 악한 상황을 이겨나가는 데 충분치 않아 이들은 종종 좌절하거나 참담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께 그 뿌리를 두고 있고, 개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 희망의 원천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계획은 한낱 헛된 꿈이 아니다. 이 계획은 현재 잘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띤 교회 안에서 이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한데 모여 기뻐하고 화해하고, 각자의 전망, 사랑과 희망을 나눈다. 교회는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학교이다 (푸에블라 문헌, 1979)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면 해야 할 복음 사명은 분명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성삼위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영원한 희망을 얻으며, 어떤 좌절이나 역경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게 된다.

 

사랑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사랑과 사랑 그 자체이신 성령으로 인해 제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사랑은 밖으로 향하게 되어 성삼위처럼 전 세상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성삼위가 사랑하신 것처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의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고린도 1134절에서 7절에 나타나는 사랑의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 활동, 국가 간 일이건, 강대국이건, 이웃이건, 사업이건, 단체이건 개인이건 간에 일어나는 활동의 진정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단일한 기준을 마련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이 활동이 정말로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정말로 이 활동이 인간관계를 증진하는데 도움이 될까? 혹시 이것이 하느님의 활동과 배치되거나 분열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 활동이 근본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이지는 않은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의 요청을 고려하고 있는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에페소서 14) 이는 내가 성삼위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잘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내가 친밀하게 성삼위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우리는 결코 성삼위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마운 사랑과 응답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된다.

성삼위는 진실한 사랑 안에서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다. 이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단단하게 굳어 있고 아무리 우리가 제멋대로 고집을 부린다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동안 많은 악과 부딪쳐도 성삼위의 사랑은 절대 실망하지 않으며, 우리 세상 안에서 선하다고, 귀중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성삼위의 사랑은 고통을 통해서 강해지는 지혜로운 사랑이다. 이 사랑을 통해 악은 사라지게 된다. 악인을 없애기 때문에 악이 사라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악인들을 감싸 안고 십자가 위에 펼치신 예수의 팔 안에 그들의 죄악을 포용하기 때문에 악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이 바로 단테가 표현했던 하늘의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며, 하느님의 이상과 우리 마음 안의 깊은 열망을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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